<乙의 새해 희망가> '저녁없는 삶' 대리기사 "밤에 자는 삶을"
(서울=연합뉴스) 최평천 기자 = 찬바람이 부는 겨울밤 다른 이들이 대개 퇴근하는 시간, 두꺼운 외투 차림으로 출근하는 이들이 있다.
연말에 줄줄이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흠뻑 취한 이들을 집에 데려다주면서 음주 운전까지 막아주는 '수호천사' 같은 존재. 바로 대리기사들이다.
하지만 가족과의 '저녁 있는 삶'까지 포기한 이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단하기만 하다.
지난해 12월 27일 밤 10시께 서울 금천구 지하철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서 만난 3년차 대리기사 박모(52)씨는 영하 5도까지 떨어진 날씨에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했다.
쉴새 없이 콜이 울리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박씨는 10분 만에 고양시 지하철 3호선 화정역 방향으로 가는 손님을 잡았다.
번화가인 화정역에 손님을 내려주면 근처에서 다시 다른 콜을 받기가 쉽다. 박씨는 "출발부터 운이 좋다"며 웃었다.
그의 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기다렸지만, 손님이 나오지 않아 한참 동안 추위에 떨어야 했다. 행여나 콜을 취소할까 봐 박씨는 재촉 전화도 하지 못했다.
30여분이 지나서야 나온 40대 초반의 손님은 모임이 길어져 늦었다며 자동차 열쇠를 건넸다. 박씨는 "예"라고 짧게 답하고 운전석에 올랐다.
화정역 인근 아파트에 손님을 내려준 박씨는 번화가로 발길을 옮기면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목적지가 좋은 콜을 놓치지 않으려면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다.
다행히 첫 번째 손님을 내려준 아파트가 번화가와 가까워 교통비를 추가로 들이지 않고 걸어서 나올 수 있었지만, 칼바람에 전화기를 쥔 손은 얼어갔다.
박씨는 밤부터 새벽까지 7시간 동안 총 5번의 콜을 받으며 서울 곳곳을 누볐다. 보통 저녁 8시께 나와서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일을 한다고 한다.
박씨는 자신의 집에서 2㎞가량 떨어진 개봉동에서 새벽 5시에 일을 마쳤다. 다행히 걸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박씨는 "손님들한테 총 15만원을 받았다. 수수료 20%와 교통비·통신비 등을 떼면 10만원 정도 남는다"며 "오늘은 수익이 높은 날이다. 보통은 한 달에 150만원을 번다"고 전했다.
스마트폰에서 콜을 기다리는 대리기사
대리기사에게 힘든 점은 참 많다. 밤낮이 바뀌는 업무라 체력적으로 힘들다. 무엇보다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손님과 업체의 '갑(甲)질'이다.
특히 대리기사의 가장 큰 '적'은 탑승하자마자 다짜고짜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만취 손님이다.
운수 좋은 날인 이날은 다행히 만취한 손님이 없었지만, 10명 중 1명꼴로 이러한 고객을 만난다고 박씨는 전했다.
특히 '을(乙)'이라는 이유로 대리기사에게 욕설하거나 심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다.
잠이 든 손님이 목적지에 도착하고서도 깨어나지 않으면 '시간이 돈'인 대리기사에게는 참 곤란하다. 여자 손님일 경우 몸을 흔들어 깨울 수도 없어서 더욱 곤혹스럽다.
여러 대리운전 업체에 중복으로 콜을 해 늦게 도착한 대리기사들이 허탕을 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콜을 받아 서둘러 가보면 손님은 이미 다른 대리기사와 함께 떠났거나, 대리기사가 동시에 도착해 한 명은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목적지를 속이는 손님들도 있다. 목적지를 번화가로 하면 대리기사를 쉽게 부를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해 일부 손님들이 실제로는 외진 곳으로 가면서 거짓말을 하는 때가 적지 않다.
외진 곳에 손님을 데려다주면 대리기사는 한참을 걸어서 번화가로 나오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를 타야만 한다. 이럴 경우 손님에게 추가 요금을 요구하다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대리 업체가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업체들은 요금을 낮추며 경쟁을 벌였고, 그로 인한 손해는 대리기사들에게 돌아갔다. 20%인 수수료는 그대로인 채 손님에게 받는 요금만 줄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20년 동안 근무한 은행에서 2005년 퇴직하고서 10년 동안 벌이던 사업을 접고 대리기사 일을 시작했다.
한 달 평균 25일을 대리기사로 일하면서 자연스레 지인과 만나는 모임이나 가족과의 저녁은 사라졌다. 고등학생인 아들은 자신의 직업을 물어보지는 않지만, 밤에 출근하는 것을 보면 대충 짐작을 했을 것이라고 박씨는 말했다.
그는 "지난 3년동안 아들과 함께 저녁을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며 "송년회나 모임을 가더라도 일찍 나올 수밖에 없어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대리기사들 대다수가 인생의 실패를 겪고 다시 한 번 도약하기 위해 준비를 하든 단계로 일을 시작했을 것"이라며 "낮에 일하고 밤에 자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박씨에게 새해 소망을 묻자 자신의 이익보다는 오히려 사회 전반이 나아지기를 기원했다.
"전업으로 대리기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갑자기 대리기사가 많아진 것은 그만큼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늘어난 것 아닙니까. 사회가 안정되고 경기가 회복돼 대리기사가 부족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p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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